홍콩에 막 도착했을 때 나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세 달 안에 취직하기
  - 식당 접시닦이가 될 지라도

2. 언니 집에 계속 얹혀살지 않기
  - 허름한 방 한 칸에 살 지라도

3. 영어 무작정 쓰기
  - 자꾸 틀리더라도

 
첫 세 달은 매우 순탄했다.
개발자 포지션으로 지원한 곳들은 아무 연락이 없었지만,
한국어 가능자를 찾는 다양한 회사로부터는 오퍼를 받았다.
(개중엔 워킹 비자까지 제공해 주겠다는 회사도 있었다)
 
취직도, 독립도, 영어도
모두 금세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문제는 나의 욕심이었다.
 


 
접시닦이라도 상관 없다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이왕이면 대기업'이라는 욕심이 생겨
신의 한 수라고 확신한 무리수를 두었다가
받았던 잡 오퍼들을 모두 놓쳐버렸다.
 
방 한 칸이라도 괜찮다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이왕이면 좋은 집'이라는 욕심이 생겨
언니 집에 계속 불편하게 얹혀살다가
독립 공간이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문제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렸다.
 
내 영어가 틀리든 말든 내뱉고 보자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이왕이면 고급 표현'이라는 욕심이 생겨
내 말에 신경을 너무 쓰게 되어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져버렸다.
 


 
그렇게 체류 네 달 차에 접어들면서
나는 머나먼 홍콩 섬에서
다시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넷플릭스와 맥주로 뇌를 마비시키고,
비싼 배달 음식으로 공허감을 채우며,
귀한 시간과 정착 비용을 탕진해나갔다.
 
그렇게 지내기를 한 달.
나는
방구석 우울한 뚱땡이가 되어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너무 싫었다.
이대로 성과 없이 한국에 돌아가기엔
너무 쪽팔렸다.
 
의지를 다잡으려고 하니
합리화의 회로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재활훈련이라는 건
혹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부상 당했는데 어떻게 빡세게 훈련을 해
살살 조금씩 해야지...'
 
'난 의지력 부상자이니
아주 쉬운 목표만 세워서 해나가보자!'
 


 
합리화의 회로는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
 
5주 동안 꾸준히
주 5회 이상 영어 회화 수업에 참여하는 데 성공했고,
오래 전 사두었던 프론트엔드 개발 강좌를 완강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만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해나가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인생 재기에 대한 제대로된 방법론을 찾았다는 뿌듯함에
엄마에게 근황 톡을 위한 영상통화를 걸었다.
 
기쁨도 잠시,
단단하게 일어서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멘탈은
엄마의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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